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(문단 편집) == 방송 기술 == 당시 방송 시설과 장비는 일본 등 외국에서 수입하긴 했지만, 현재와 비교했을 때 매우 조악했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다중 방송은커녕 지역국 간 이원 방송으로 연결하면 KBS 서울 여의도 본사 스튜디오나 다른 지역국들은 오디오만 믹싱해서 들어가고 비디오를 화면으로 띄울 수 없어 화면에서 빠져야 했다. 미국이 같은 시기 뉴스쇼에서 3곳을 동시에 연결하여 화면을 띄우고 다원방송을 할 때, 한국은 송출 중인 1개 화면 위에 반쯤 와이프 아웃[* 영화나 텔레비전에서, 장면을 바꿀 때에 한 장면이 화면에서 지워지듯이 사라지는 일이었다.]을 한 뒤 그 위에 다른 지역 국 송출 화면을 스크린 오버레이(screen-overlay)로 입혀 겨우 이원 방송 '흉내'나 내는 수준이었다. 현재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간단하게 크로마키(흔히 말하는 그린스크린)가 가능하지만 그 당시는 풀 전자장비가 아닌 전기식 아날로그 장비를 사용해 오버레이를 띄웠기 때문이다.[* 전자식과 전기식의 차이는 쉽게 말하면 현재의 장비가 디지털화되어 영상 파일 데이터를 컴퓨터 RAM에 띄우고 사용하는 데 비해, 전기신호 데이터를 영상장비에 띄우고 화면을 물리적으로 입히는(텔레시네의 원리) 것이다. 반면 미국의 경우는 1983년 당시에 이미 컴퓨터를 방송장비에 활용하고 있었다.] 그나마 서울KBS는 본관의 여의도 스튜디오[* 1976년 준공되어 당시로서는 겨우 7년 된 건물이었다.]와 별관[* 1980년 준공된 구 TBC 건물]이라는 최신식 시설을 갖추고 있었지만, 장비의 운용 노하우는 미국과 일본에게 여전히 뒤처지던 상황이었다. 또한 방송자막은 '수파'[* 원래 단어 '슈퍼임포즈(superimpose)'의 줄임말로, 슈퍼의 일본식 발음(스파인포즈 スーパーインポーズ)이 와전된 것이다.]라 불리던 아날로그 텔레시네 작업이었기 때문에, 현재처럼 컴퓨터 키보드로 두들겨 금방 띄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, 상단에 있는 타이틀 캡쳐에서 보듯 캘리그래피(손글씨)로 일일이 써서 스캔하거나 혹은 활자로 자막작업을 거쳐 화면에 띄워야 했다. 그래서 방송 초반 3일간은 화면에 지역국 표시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, 서울과 지역국 간 수파 디자인도 통일되어 있지 않아 폰트나 자막위치가 왔다갔다한다. 방송 초기 영상들을 보면 서울 송출화면과 지역국 송출화면 간의 화질차이가 굉장히 심한 것을 알 수 있다. 서울 장비는 일본 못지않은[* 서울올림픽을 대비해서 전부 최신식 일제 장비로 교체한 상태였다.] 것이었으나 지방방송국은 카메라 2~3대에 조명도 조악했기 때문에 화이트밸런스도 심도도 엉망이고, 대전 같은 곳은 대도시 지역총국인데도 불구하고 연결할 때마다 오디오 하울링이 심하고 지방 출연자들은 이어폰을 끼고 있다.[* 이런 기술적 차이의 또 다른 예는 ID영상과 넥스트 영상이다. KBS 본사에서 1984년경부터 1TV와 2TV ID영상으로는 움직이는 영상화면이나 애니메이션을 내보냈는데 KBS 3TV와 지역국은 88올림픽 이후인 1990년대 초반까지 정지영상이나 스틸을 송출했고, 이는 MBC도 마찬가지였다.] 부산방송총국은 이후 본사와 같은 신식 장비로 바꾸어, 남아있는 영상을 보면 9월경부터 화질이 개선되고 이어폰 없이 출연자들을 연결하는 것을 볼 수 있다. 또한 서울 KBS 본관뿐만 아니라 각 지역방송총국을 SNG로 연결해서 생방송하는 기법도 이때 활성화되었다. 현재와 비교해볼 때 조악한 방송기술이지만, 이 당시의 난장판에 가까운 실황과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, 1988년 서울 올림픽까지 굵직한 이벤트를 거치며 한국의 방송중계기술은 비약적 발전을 하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